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마누엘 2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멸망 ==== 카를루스 1세가 장남 루이스 필리프와 함께 피살된 후, 암살을 가까스로 모면한 차남 '''[[마누엘 2세]]'''가 포르투갈 왕국의 새 국왕에 선임되었다. 1908년 2월 2일 오후 군복을 입은 채 국무회의를 주관한 젊은 군주는 신하들에게 자신이 통치하기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니 많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그가 왕으로서 내린 첫번째 지시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 체제를 구축해 민심을 요동시키고 아버지와 형을 제대로 경호하지 않은 주앙 프랑쿠 페레이라 핀투 내각에 사임을 종용한 것이었다. 이후 새 총리에 선임된 프란시스쿠 페레이라 두 아마랄은 진보당과 개혁당 인사들을 골고루 포진시킴으로서 행정 독재를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의회를 정상으로 되돌렸으며, 정치범들을 해방하고 공화당의 언론 자유의 보장, 카를루스 1세 암살 주동자들의 묘소에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것을 허용 등의 요구사항을 어느정도 받아들였다. 이러한 정책은 들끓어오르던 포르투갈 정계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공화주의자들에게 왕실과 정부가 약하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1908년 5월 6일, 마누엘 2세는 의회를 소집한 뒤 의원들 앞에서 정식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으며, 아버지의 국정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으니 앞으로는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에 따라 국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사회 문제"라는 한 가지 사안을 직접 거론하며 이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마누엘 2세가 지목한 사회 문제는 [[산업혁명]] 이래로 도시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가중되고 공화주의와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 왕실의 안위가 흔들리는 상황을 의미했다. 산업화가 미약한 포르투갈에서는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별로 강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의 경제 위기에 편승하여 점점 세력을 불리는 공화당에 상당한 사회주의자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마누엘은 공화당과는 양립하기 어렵지만,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주의자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공화당과 사회당이 서로 갈라서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1909년, 마누엘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몽 푸앵카레]]를 포르투갈로 초대해 포르투갈의 실정을 직접 조사하게 했다. 푸앵카레는 포르투갈 전역을 여행하며 실태를 확인한 뒤, 마누엘에게 광범위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지역 정부와 행정을 재편하고 정치 개혁을 올바르게 이끈다면 포르투갈 왕실의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왕은 이 조언에 고무되어 1909년 6월 각료회의 의장인 벤체슬라우 드 리마에게 서신을 보내 최근 사회당이 아퀼레스 몬테바르데의 지도 아래 통합된 것을 이용해 몬테바르데와 접촉해 정권과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라고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장담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노동계급을 공화당으로부터 우리 편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유용하고 생산적인 힘이 될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후 왕과 아퀼레스 몬테바르데간의 서신이 연이어 교환되었다. 1910년 7월에는 국립노동연구소 설립을 목표로 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 위원회에는 3명의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몬테바르데가 위원회가 효과적일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자, 왕은 공공 사업부 장관을 통해 정부에 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국왕에게 호의를 표했지만, 이 정도로는 날로 강성해지는 공화주의자들을 견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마누엘 2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스페인, 프랑스, 영국을 방문하고 각국의 수장들과 서신을 교환했다. 특히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의 확실한 지원을 받기 위해 영국 공주와 결혼하고자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7세]]는 카를루스 1세가 암살된 일에 깊은 경계를 품고 공주를 보내기를 주저했고, 결혼 협상은 장기간 지연되다가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마누엘 2세는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해 영국의 새 국왕 [[조지 5세]]에게 위로를 전하며 포르투갈을 계속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정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그의 통치 2년간 7개의 내각이 수립되었다가 해산되길 반복했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개혁당과 진보당은 서로간의 심각한 갈등과 내분으로 약화되었고, 공화당은 갈수록 강해져 1910년 8월 28일 선거 결과 9%의 지지율을 얻으면서 14명의 의원을 진출시켰다. 하지만 공화당은 여전히 개혁당과 진보당이 의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거로 정권을 차지할 가망은 없다고 여기고, 혁명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1910년 여름부터 리스본에서 혁명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들끓자, 정부는 도시 수비대에 대기 상태를 유지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군부 내의 많은 인사들은 군주제는 미래가 없고 공화정 만이 포르투갈을 살릴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910년 10월 3일, 공화당 당수 마차도 산투스는 제16보병 연대로 가서 제16보병 연대에게 거사를 단행하라고 요구했다. 사전에 공화당과 내통한 상병 다수가 즉시 병사들을 선동해 봉기를 일으켰고, 이를 막으려던 사령관과 대위는 피살되었다. 한편, 해군 제독 카를로스 칸디도 두스 헤이스는 수십 명의 카르보나리오들과 함께 제1포병 연대로 이동해 그들을 회유시킨 뒤 마차도와 합세했다. 이후 여러 함대와 포병 연대가 가세했지만, 혁명에 가담하기로 해놓고 실제로는 가담하지 않은 부대도 많았고 정부군 역시 비교적 신속하게 병력을 소집해 대응에 나섰기에 성공 여부는 불확실했다. 공화파에 동조하는 일부 부대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거나 군주 편에 섰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혁명 세력은 로툰다와 알카타라에 참호를 파고 수비에 전념하면서 토벌대에서 추가 이탈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식민지의 독립 세력을 상대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던 엔히크 드 파이바 코세이루가 이끄는 보병 제2연대와 기병 제2 연대는 로툰다 인근에 이동식 포대를 설치해 혁명군을 격멸하려 하다가 혁명군의 역공을 받았다. 코세이루는 수적인 열세에 굴하지 않고 항전하면서, 리스본 사단 사령관 안토니우 카르바할 장군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카르바할은 철수 명령을 내릴 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고, 코세이루는 절반 가량의 병력을 상실하고 퇴각했다. 또한 카르보나리우들은 혁명이 개시되자마자 전신선을 차단해 리스본 외부 부대에 토벌 명령이 전달되지 않게 했으며, 명령을 이미 입수한 부대가 이동할 수 없도록 철로 역시 끊었다. 여기에 혁명군에 가담한 순양함 상 라팔 호가 로툰다와 알칸타라 사이의 루시우에 주둔한 정부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정부군의 사기는 갈수록 악회되었다. 한편, 마누엘 2세는 포르투갈에 방문한 [[브라질 대통령]] 당선자 [[에르메스 다 폰세카]]를 위한 연회를 베푼 뒤 파초 다스 니디다데스 궁전에서 일부 관리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전화를 시도했지만 회선이 끊어진 것을 발견하고, 사람을 보내 페나 궁전에 있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얼마 후 카르보나리오 수십 명이 궁궐로 침입하여 창문에 총격을 가했지만, 궁궐 수비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날 9시경 회선이 겨우 연결된 직후 의회 의장으로부터 "반군이 함포 사격을 가하고 있으니 마프라 또는 신트라로 피신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마누엘 2세는 "헌법이 내가 여기서 죽어야 하는 역할을 맡겼기에 나는 이를 완수할 것이다"라며 거부했지만, 정오 무렵 혁명대에 가담한 함선 아다마스토르와 상 라팔이 파초 다 니디다데스 궁전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궁궐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다. 마누엘 2세는 궁전 공원의 작은 집으로 피신한 뒤 안토니우 테세이라 드 소자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케일스 궁전에 배속된 포병대를 니디다데스 궁전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안토니우는 반란군 주력 부대가 로툰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을 억제하려면 포대가 거기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우선 신트라 또는 마프라로 피신하고 니디다데스 궁전을 수비하고 있는 병력을 로툰다의 반군 토벌에 투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결국 마누엘 2세는 궁전을 떠나기로 하고 오후 2시에 마프라를 향해 떠났다. 오후 4시경 마프라에 도착했으나, 마프라를 수비하기로 되어 있던 800명의 군인과 지휘관은 온데 간데 없고 단지 100명 미만의 군인만 있었다. 여기에 니디다데스 궁전을 지키던 병사 상당수가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로툰다로의 공세 역시 이뤄지지 못했다. 10월 4일 새벽, 로툰다와 루시우의 양 포병대가 서로를 향해 발포를 가했다. 포격전은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혁명군 측이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8시경에 양측 수뇌부가 외국 시민들을 대피시킬 시간을 벌려는 독일 대사의 요청에 따라 1시간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하면서 전투가 중단되었다. 이후 독일 외교관이 혁명군과 휴전 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백기를 든 채 로툰다 쪽으로 향하자,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민중들이 정부군이 항복했다고 여기고 거리로 뛰쳐나와 "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이에 루시우에 주둔한 정부군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항복하거나 집으로 도망치면서, 대세는 혁명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오전 9시 리스본 시청 건물의 발코니에서 공화파 지도자 주제 헬바스가 서서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고, 포르투갈 공화당 의원들이 장관직을 맡은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마누엘 2세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 10월 5일 가족들과 함께 마프라에서 포르투로 향하는 왕실 요트 아멜리아에 탑승했다. 그러나 요트는 도중에 방향을 돌려 [[지브롤터]]로 향했다. 그가 지브롤터로 이동하라는 측근들의 설득에 따르기로 했는지 또는 도중에 목적지를 변경하도록 강요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지브롤터에 하선한 마누엘은 얼마 후 포르투마저 공화국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가족 및 측근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해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영접을 받았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